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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T일반

테일러 스위프트, 스트리밍과 완전한 전쟁 선포

via_BusinessInsider


 필자는 지난 5일, '테일러 스위프트와 스포티파이, 불법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사이'라는 글을 통해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와 그녀의 레이블인 빅머신이 스포티파이에 자신의 음원을 제거할 것을 요청했고, 스포티파이는 스위프트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justsayyes 캠페인을 통해 그녀가 돌아오길 권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 스트리밍과 완전한 전쟁 선포
 
 필자의 주장은 그랬습니다. '어느 쪽도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한쪽에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를 실마리로 스트리밍 서비스와 불법다운로드, 아티스트의 수익성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던 중 야후 뮤직은 스위프트와 해당 문제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거부한 건 굉장히 단순한 이유입니다.
 
 '아티스트는 아티스트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만한 대가가 지급되어야 한다.'
 
 인터뷰 내용을 길지만, 핵심은 이겁니다. 그녀는 '음악에 값이 없거나 무료여야 한다는 인식에 영원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이 그녀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인식하는 범위이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거부한 이유를 방증합니다.
 
 그녀는 다섯 번째 앨범인 '1989'는 첫 주에 128만 7,000장이 판매되었고, 이는 에미넴이 12년 전에 세운 132만 2,000장의 판매량을 가뿐히 넘을 것으로 보이면서 '과연 앨범 시장이 불황인가'하는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인터뷰에서 밝힌 만큼 단지 스포티파에서 발을 뺀 것과 달리 그녀는 완전한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건 경이로운 앨범 판매량이 뒷받침하는 덕분이고, 대개 아티스트들은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앨범 판매는 둘째치고, 스트리밍 유통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법다운로드 탓에 제대된 유통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스위프트는 자신이 진보적이고, 인정받지 못하는 아티스트를 대변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로써 필자의 생각도 약간 바뀌었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녀는 스트리밍 서비스와 스트리밍의 수익이 앨범 판매보다 좋지 않다는 것, 아티스트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술의 가치가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창작자에 돌아가야 하는 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결국 대중입니다. 스위프트가 비주류 음악을 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대중과의 접촉이 중요하고, 미디어의 발전은 그녀를 세계적인 싱어송라이터로 자리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미디어의 발전으로 등장한 것 중 하나가 스트리밍 서비스입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저 음악을 듣도록 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들은 음악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고, 앨범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경험을 얻기 위한 장치입니다. 대중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새로운 경험을 하는 만큼 그녀의 가치도 상승할 겁니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앨범을 구매함으로써 앨범과 돈이 오고 가는 과정에서 그 가치가 증명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는 방식과 경험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죠. 앨범만으로 음악적 경험을 하라는 것으로 불법다운로드가 만연한 시대에 영화를 왜 영화관에서 보는지, 한 번 본 영화를 왜 상영관을 바꿔서 다시 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가치를 앨범 판매에만 옳아 메는 것입니다.
 
 당연히 앨범 판매량이 많으니 그렇게 생각할 순 있습니다. 문제는 그 새로운 경험을 앨범을 구매한 팬들도 얻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앨범을 구매한 팬도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스위프트의 음악을 접하고, 앨범을 구매한 사람도 있겠죠. 어쨌든 스트리밍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 앨범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은 분리되어 있고, 사람들은 이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진 않지만, 128만 명은 앨범의 경험을 얻으려 했고, 스포티파이의 4,000만 명은 스트리밍의 경험을 얻고자 합니다.
 
 스트리밍의 수익이 낮으니 아티스트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귀족들의 향신료였던 후추의 가격이 저렴해져서 이젠 가공한 후추가 아닌 통후추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오늘날, '후추의 향신료로서 가치는 중요하므로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후추의 중요성과 가치가 변한 게 아니라 후추를 생산하는 방식, 유통하는 방식, 활용하는 방법이 바뀌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겁니다.
 
 스위프트는 '음악은 예술이며, 예술은 중요하면서 드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음악을 생산하는 방식, 유통하는 방식, 음악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위치가 변한 시대에 앨범을 구매한 사람만이 음악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아티스트와 함께 한다는 사고방식은 매우 낡았습니다. 미디어의 혜택을 받으면서도 혜택이 부족한 부분은 '아티스트의 가치를 저해한다.' 자체가 아이러니죠.
 
 


 스위프트가 '스트리밍 가격에 조정이 필요하고, 그것이 아티스트에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면 필자도 비판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는 다른 아티스트의 위치를 대변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과감히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그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스트리밍 서비스도 돈을 지급하고 듣는 방법이고, 결코 무료 서비스는 아닙니다. 사용자가 무료로 듣더라도 저작권료는 서비스 업체가 지급하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이고, 아주 즉석에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스위프트의 주장대로라면 그녀의 기사가 실린 기사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므로 언론들은 죄다 구독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건 그녀도 원하는 게 아닐 거라 믿습니다. 기사는 예술이 아니므로 음악보다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끔찍하겠지만요.
 
 적어도 앨범을 구매했든, 구매하지 않았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던 팬들은 그녀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돈에 미쳤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만 보더라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음악적 가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된 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