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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T일반

HP 분사, PC 시장을 포기한 것


 지난 3일, 필자는 'HP, 스트림이 구원투수가 될 수 없는 이유'를 통해 HP의 PC 시장 포지셔닝을 살짝 얘기했습니다. 스트림 11이 저가 시장에 영향을 주겠지만, HP가 회복하기 위한 제품이 아닌 순전히 마이크로소프트를 위한 제품이란 것이었죠. 빠르게 확장할 수 없는 고급 PC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저가 시장조차 주도적이지 못한 어중간한 위치가 HP가 서있는 곳입니다.
 


HP 분사, PC 시장을 포기한 것
 
 근 5년 동안 HP는 헛발질의 연속이었습니다. 넷북으로 재미 본 이후로 모바일 폭풍에 인수, 분사, 구조조정, PC 제품 평가 하락까지 굴곡 없이 하향 곡선을 달렸습니다. 2011년에 맥 휘트먼(Meg Whitman)을 CEO 자리에 앉혔지만, IBM의 루 거스너(Louis Gerstner)처럼 HP를 늪에서 꺼내주길 바랐던 것과 달리 방향은 비슷했으나 거스너 이후 샘 팔미사노(Sam J. Palmisano)처럼 영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저 구조조정만 시도하면서 거액의 연봉을 챙겼기에 비판도 상당했습니다.
 
 


 HP는 규모를 줄이고, 줄여 드디어 분사라는 결단을 내렸나 봅니다.
 
 지난 6일, HP CEO 맥 휘트먼은 'HP를 2개로 분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안타깝게도 HP와 컴팩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HP 엔터프라이즈(HP Enterprise)'와 'HP Inc'로 쪼개지며, 쉽게는 엔터프라이즈 부문과 PC 및 프린터 부문이 나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HP가 분사 계획을 낸 것이 이번만은 아닙니다. 2011년에도 PC 사업부를 분사할 것인지, 매각할 것인지 논의가 깊었고, 거의 다른 회사로 분류했었습니다. 로고만 함께 사용할 뿐, 실적이 더 떨어지기 전에 PC 부문을 처리하여 몸집을 줄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CEO를 교체하면서 논의를 철회해버렸죠. 그러고 3년 만입니다.
 
 HP가 PC 부문을 떼어낸 이유는 첫 번째가 '실적'입니다. 윈도 XP 지원 종료 덕분에 잠깐 상승한 PC 실적은 다시 감소할 예정이고, 적자를 면치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함께 분사한 프린터 사업도 적자 상태로서 이를 조정하기 위해선 박리다매를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해야 하지만, 레노버의 강세로 여력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EMC와의 합병 논의'입니다. 지난달, EMC는 HP와 델, 각각 합병에 대해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MC의 회사 합병 회의에 HP가 참여했고, 델의 일부 사업을 인수하는 것으로 합병의 쟁점이 PC 사업부가 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EMC가 PC 사업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으며, 포함하여 인수할 매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나마 생존 가치가 있는 엔터프라이즈 부문만 합병 조건으로 내걸고, PC 부문을 자연스럽게 소멸시키거나 따로 매각 처리하는 것은 HP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마지막으로 'PC 시장 대응책'입니다. PC 사업이 HP의 몸집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PC 사업을 유지하려면 그만큼 몸집도 줄어들어야 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HP는 분사까지 총 5만 5,000명의 인원을 감축할 계획인데, PC 사업을 소규모로 운영할 수 있다면 실적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IBM은 진작 PC 시장에서 빠졌고, 델도 PC보단 엔터프라이즈에 집중하고 있으며, 후방의 삼성도 최근 PC 사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HP가 PC 부문을 매각한다면 후보가 레노버와 에이수스 정도인데, 두 기업도 굳이 돈을 들여서 인수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매각보다는 분사를 통해 생존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별개의 회사로서 대응하는 것이 기미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사를 통해 PC 사업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앞서서 웹 OS 부문을 그램이라는 별도 회사로 분사한 뒤, 매각 상대가 나타나자 팔아버린 것을 생각해보면 엔터프라이즈 사업에 집중하기로 한 상황에서 PC 사업에 눈을 돌릴 틈은 없습니다. 애물단지죠. 분사로 당분간 PC 사업을 유지해도 순간이며, 분리한 자금을 엔터프라이즈 쪽으로 돌리면서 회사는 유지하고, 매각 상대가 나타나면 팔아버리거나 규모를 차츰 줄여갈 것입니다.
 
 더군다나 엔터프라이즈 사업에 HP의 PC나 프린터를 사용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규모만 줄일 생각이었다면 분사할 필요가 없고, EMC와의 합병으로 PC 사업에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면 일부러 HP 제품을 이용하기 보단 엔터프라이즈 사업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처음부터 성장이나 유지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죠. 즉, HP조차 HP 제품을 적극적으로 소비하지 않을 테고, 규모도 줄어든다면 이는 HP가 PC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도 엔터프라이즈 쪽이 흡수했기에 HP Inc는 거의 하드웨어 제조만 떨어진 것이며, 더는 PC 시장이 제조 기술만으로 생존할 수 없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드웨어 제조만 떨어뜨려서 분사했다는 건 PC 사업에서 희망을 찾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HP의 선택은 어찌보면 IBM과 비슷하고, 체제 전환을 목적도 뚜렷하여 긍정적입니다. PC 시장에 가망이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기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보단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보면 혹을 떼낸 것처럼 시원합니다. 투자자들에게도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대신 PC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HP가 PC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시대를 보여주면서도 기술 시장에서 오랜 시간 생존하기 위해 어떤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지, 그리고 선택과 결정에 얼마나 과감해야하는지 잘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기에 HP가 주춤했던 그 시간이 씁쓸합니다.
 
 


 물론 규모가 줄어든 채 PC 시장에 계속 머물 순 있습니다. 소니도 PC 부문을 매각했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도 아니고, 바이오 브랜드를 달고 제품을 출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과거의 영광은 찾기 어려워도 존재하긴 하니 HP의 PC를 꽤 오랫동안 만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단지 HP가 '그' HP가 아니라는 것이 HP의 PC 시장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며, HP라는 이름이 존재했었다는 의의만 부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HP는 일반 고객이 아닌 엔터프라이즈 고객과 긴밀해질 테고, 재기할 기회를 다시 잡았습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