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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T일반

'스티브 잡스는 재앙이다', 제정신인가?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기술낙관주의'입니다. 기술낙관론자들은 마치 새로운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이뤄주는 마냥 기술의 전망의 부정적인 부분은 보지 않으려합니다. 기술을 얘기하지만, 기술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와 더불어 싫어하는 것이 '기술비관주의'입니다. 모든 것이 '기술 때문이야!!!'라고 울부짖는 헛된 망상의 그늘말이죠.





'스티브 잡스는 재앙이다', 제정신인가?


 배우 박상원은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해 '스티브 잡스는 21세기 재앙을 가져다 준 인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자신이 문자메세지나 이메일 등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와 더불어 '스마트 기기들이 가족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 감정을 메마르게 했다'며,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잡스를 디지털에 빗대어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굳이 오류를 잡자면, 스마트폰의 발명가가 스티브 잡스도 아니거니와 어찌되었건 스마트폰은 계속해서 발전해 SMS와 이메일을 좀 더 활성화 시키는 쪽으로 발전해왔습니다. 단지 잡스가 그것을 확 앞당겨버렸다는 것 뿐이죠.

 원래 오늘 이 주제로 포스팅을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주제를 다룬 것은 스티브 잡스에 대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비관에 대한 분노때문입니다.




박상원




박상원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늦게 스마트로 전환 할 것'이라며, 자신의 원칙이라고 밝혔습니다. 좋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원칙이고 소신이며 지켜나가는 것에 뭐라고하진 않겠습니다.

 '문자 메세지를 보내 본적이 없고, 메세지가 오면 답장을 하지 않고 전화를 걸며,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고 자필 편지에 우표를 붙여서 보낸다'

 조금은 느리지만, 빠름이 아닌 여유로운 아날로그적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그의 삶의 방식 자체를 비판하진 않겠다는 겁니다. 다만, '디지털'을 사회악으로 표현한 부분에 대해서 소신이나 삶의 방식과 상관없이 기술에 대한 비관적인 발언은 흘러들을 수 없었습니다.




기술비관




 그의 말대로라면 스마트폰이 가족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스마트폰이 없어지고 SMS가 사라지고, 이메일의 존재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가족과의 관계가 돈독해졌을까요? 물론 현대에 와서 직접적인 소통이 줄어들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웹이라는 것을 통해 소통이 좀 더 다양화되고 폭넓어졌으며 대중의 인식변화에도 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가족 관계 단절의 원인이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에 제대로 도달되지 못한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느림의 미학을 즐기며 아날로그적 낭만을 즐겼을지 모르지만, 반대로 소통하는 상대방의 디지털적 소통을 단절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소통의 주체는 '사람'이고 스마트폰은 단지 소통의 도구일 뿐 소통의 방법이 되진 못하는데, 그 탓을 기술에 돌려버리는 형태 자체는 기술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21세기에 재앙을 준 인물이다?


 한때 기술낙관론자들이 '트위터는 소통 대혁명이다'라며 난리를 쳤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트위터가 소통의 방법에 변화를 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변화를 줬을 뿐 사람이라는 소통의 주체가 변하진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간접적인 소통이 대부분인 공간에서의 문제점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술비관론자들은 '거봐라. 트위터가 남긴 것은 부작용 뿐이다'라며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기술에 매진하거나 아니면 매도하거나 둘 중 한가지라는 것이죠.


 하지만 기술은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타나진 않습니다. 가족간에 페이스북으로 소통을 하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엄마와의 문자 메세지를 서스럼 없이 보내는 아들이 있고, 손녀와 영상통화를 즐기는 할아버지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단절된 가족 개개인을 트위터에 메달리게해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가 하면, 문자 메세지를 통한 욕설로 언어적 폭행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이전에 내가 부모라면 '아이들과 허물없이, 비밀없이 페이스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가' 또는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라는 문자 메세지를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함 없는가'를 생각해보았을까요? '문자 메세지로 마저 언어적 폭행이 행해지는 현실'을 마주한 적이 있나요? 과연 우리는 디지털적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스마트폰이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관계의 해소법이나 도피처로 스마트폰이 사용되진 않았나요?


 박상원의 발언은 모든 근본적 원인을 기술에 돌려버리는 매우 몰상식하고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정작 자신은 디지털적 소통을 자행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사람을 생각하라




 필자는 사람이 먼저가 아닌 기술을 먼저 얘기하는 기술낙관론자들과 기술비관론자들에 분노합니다. 그들은 이로운 기술을 병들게 하고 해로운 부분마저 찬양하기도 합니다.

 박상원은 배우이고, TV를 통해 성공한 인물입니다. 기술낙관론자들은 TV가 세상을 비춰주는 창문이라고 생각하며, 기술비관론자들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기술비관론적인 박상원이 TV를 통해 성공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정작 그도 TV라는 기술을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디지털적 소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고집불통인 것이죠.


 '디지털의 편리함이 싫다', '그 이유는 가족과의 단절과 인간 감정의 메마름이다'. 디지털의 빠르게, 그리고 편리하게의 모토가 실제 이런 부분을 심화적으로 들춰낸 것은 분명합니다. 좀 더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고 빠르게 생각을 전달하고 소통하려 급하게 돌아가는.... 우체통에 넣기 직전까지 생각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는 편지와 달리 한번 더 생각할 시간을 빼았았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을 생각한 것인가요, 기술을 비관한 것인가요. 어떠한 소통의 방법이건 주체인 사람을 생각했다면, 적어도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자 하는 담론을 웃으며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낙관론자와 기술비관론자의 논리로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미궁에서 대립하고 싸우기만 반복합니다. 이것이 박상원의 기술비관적 발언에 분노하는 이유이자, 이것을 기술론적 관점에서 빠르게 이끌어 낸 인물에 대해 재앙이라고 한 표현을 제정신으로 한 소리냐고 되묻는 이유입니다.

 적어도 박상원이 사람을 먼저 생각한 인물이었다면, '조금은 디지털적 소통을 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날로그적 감성과 느림의 미학을 전달하기 위해 편지와 그나마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전화를 주로 하고자 한다'는 발언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그에게 제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