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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APPLE Geek Bible

아이팟 터치가 애플에 지닌 포지셔닝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한 지 5년이 되었지만, 또 한 가지 5년 된 제품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팟 터치'입니다. 전화 없는 아이폰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제품으로 국내에선 아이폰보다 더 빨리 출시되어 아이폰 도입 전 대용으로 구매하는 소비자가 있기도 했었죠. 항상 아이폰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그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해온 제품입니다.




아이팟 터치가 애플에 지닌 포지셔닝


 아이팟 터치는 원래 아이폰의 와이파이 버전과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MP3의 가죽을 쓰고 PDA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폰의 구 버전을 저가 제품으로 판매하면서 굳이 아이팟 터치를 구매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놓입니다. 약정이면 공짜로 아이폰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사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애매한 포지셔닝으로 보입니다.




 1억





 지난 주, $229짜리 16GB 아이팟 터치를 출시한 애플은 아이팟 터치의 누적 판매 대수가 1억 대를 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 해, 누적 판매 1억 대를 달성한 아이폰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동안 아이폰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있던 아이팟 터치의 누적 판매량은 의미가 컸습니다. 작년 같은 시기에 누적 판매량이 8천 200만 대였으니, 1년 만에 1,800만 대를 판매한 것이며, 이전 분기까지 전체 아이팟 판매량을 볼 때 아이팟 터치가 전체 아이팟 판매량의 32%를 담당하는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이팟 터치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합니다. 먼저 '아이폰 유저가 아이팟 터치를 구매하는 일은 적을 것', 틀린 이야긴 아닙니다. '아이폰 유저가 늘어나면 아이팟 터치의 사용자는 줄어들 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으며, 구 버전의 저가 아이폰 판매량이 많아졌음에도 이름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이팟 터치가 확고한 포지셔닝을 지녔기 때문일까요?



포지셔닝





 애플의 제품은 하나같이 제품군에 가장 충실한 포지셔닝을 하고 있고, 이는 애플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아이팟 터치의 포지셔닝은 상당히 모호합니다.

 처음에는 아이폰의 기능을 가진 MP3플레이어였습니다. 웹브라우징이 가능하고 아이튠즈를 거치지 않고도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음원을 구매할 수 있었죠. 그 부분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아이폰 OS 2.0에 앱스토어가 탑재되면서 복합 멀티미디어 기기가 됩니다. 아이폰 OS 3.0와 함께 SDK가 공개되면서 MP3플레이어를 넘어 좀 더 확장된 PDA 범주에 포함됩니다. 애플은 이후 MP3플레이어보다 PDA의 포지셔닝을 강화하여, 성능은 아이폰보다 떨어지지만, 더 얇고 가벼운 제품으로 굳힙니다. 외형의 변화가 크게 없어 비난도 받았지만요. 그렇게 5세대가 되어서는 아이패드 미니의 시장 잠식으로 PDA의 모습보다는 멀티미디어 플레이어로 다시 포지셔닝합니다. 그리고 4세대에 전면 30만 화소, 후면 70만 화소의 카메라 성능을 120만, 500만 화소로 대폭 높여 페이스타임과 사진 촬영 등에 더 적합하도록 개선합니다. 무게는 더 가벼워지고 색상도 늘렸습니다.


 어떤 제품이란 것은 정해져 있지만, 포지셔닝은 유동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단가 맞추기나 저렴한 아이폰 버전 쯤으로 생각하면 쉽겠지만, 포지셔닝에 따라 제품이 지니는 가치도 많이 변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판매량을 유지해 1억 대의 성과를 이룬 것은 상황에 따라 포지셔닝의 이동이 적절했음을 뜻합니다.


 새로 출시한 16GB의 아이팟 터치를 봅시다. 후면 카메라를 없애고 전면 카메라만 살려놓았습니다. 누가 봐도 페이스타임용 카메라입니다. 후면 카메라를 통한 사진 촬영을 배제하고 멀티미디어와 전면 카메라를 통한 페이스타임, 그리고 메세징만을 위한 새로운 포지셔닝을 다시 구축했습니다. 이를 보고 저가 판매를 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가격이 저렴해지고 후면 카메라를 과감하게 뺌으로서 스탠드를 이용한 데스크용 제품 등에 사용하는 것도 수월해졌습니다. 단지 아이팟의 전체적인 판매량이 줄고 있기 때문에 저가 모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포지셔닝에 따라 저가 모델이 되었고, 포지셔닝에 걸맞은 수요를 따라가도록 짜놓은 것입니다.




아이팟 터치




 애플에 아이팟 터치는 적재적소에 있어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폰의 이후 아이팟 터치가 출시되면서 아이팟 라인과 아이폰 사이의 공간을 채워넣었고, 가격이 높았던 아이폰에 대한 접근성을 아이팟 터치가 일부 맡으면서 iOS의 확장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이패드가 등장해 아이폰의 용량이 부족한 유저들이 아이패드를 구매해 용량을 보충하자 아이팟은 더 큰 용량에 저렴한 가격으로 카니발리제이션을 이룹니다. 아이패드 미니가 출시되어 그것이 힘들어졌지만, 카메라를 강화하고 색상을 입히면서 휴대성의 장점과 함께 차별성을 부여했습니다. 새로 출시된 16GB 아이팟 터치는 아이폰의 용량을 늘려주던 제품이 아니라 아예 용량은 줄이고, 컴팩트한 멀티미디어 기기로 바꿔버립니다.


 아이팟 터치를 합리적인 제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이폰이 있는 상태에서 아이팟 터치를 구매할 이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아이팟 터치는 그 많지 않은 이유를 대변하면서 변화한 그런 위치의 제품입니다. 합리적이어 보이지 않더라도 좁은 틈을 비집어 들어가 특별함을 과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아이팟 터치의 세대 간의 포지셔닝은 그렇게 바뀌어왔지만, 아이팟 터치라는 전체의 포지셔닝은 애플에 그런 존재입니다.


 애플은 이런 아이팟 터치의 포지셔닝을 적극 활용하고 있고, 유동적으로 보이는 포지셔닝이라도 전체에서 보면 확고한 포지셔닝의 제품군입니다. 보는 눈이 있어, 이름값 때문에 비합리적인 제품을 계속 출시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히는 애플에 가장 보배 같은 존재가 아이팟 터치이고, 그 포지셔닝의 의미는 상당히 주목할만합니다.